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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5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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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한담 2013. 1. 26. 23:12상허 이태준 집안의 격변사는 여전히 진행 중
오늘은 제 집안 얘기를 하는데 조금은 슬픈 얘깁니다.
요즘 찾아보면 상허 이태준선생의 본관이 장기이씨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장기이씨는 1960년대쯤인가에 처음으로 등록된 성씨 문중이란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몇사람입니다.
그 몇사람 중에 한명이 이 글을 쓰는 필자로 제 본관은 장수이씨입니다. 또한 철원지역을 근거지로 명맥을 이은 장수이씨 집안의 의미있는 후손입니다. 유감스런 얘기지만 전라도 장수를 근거지로 한 장수이씨들은 철원 지역의 장수이씨를 그저 긴가민가 할뿐 그들 족보에 강원도 철원지역에 장수이씨 세력이 있다는 것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수백년 전 어느때 어떤 연유로 문중에서 갈라진 갈래 한줄이 따로 있었을까요?
상허 이태준이 월북 후 사망한 것은 시점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장수이씨였던 이태준이 장기이씨로 바뀐 것은 우리 역사의 아주 슬픈 질곡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상허 이태준은 항렬상으론 필자의 부친과 같은 계보에 있지만 나이로는 필자의 할아버지와 같은 연배입니다. 그런 연유로 집안간 왕래는 드문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이 얘기는 작고하신 제 부친을 통해 들은 겁니다.
이태준의 철원에 자주 등장하는 안협 역시 철원 장수이씨 세력권이고 같이 등장하는 용담이라는 지명 또한 장수이씨 세력이 많아 지역내에선 '용담이씨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대마리를 중심으로 장수이씨들이 좀 있습니다.
이태준家가 어쩌다 러시아까지 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철원지역의 지정학적 인문환경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남북으로 갈라져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한 사람들로 구성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강원도 철원을 기점으로 한 북한 지역은 당시에 러시아로도 많이들 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태준은 성장 후 일본 유학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아주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갔던 것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그 부친은 일본 보단 러시아쪽의 근대화 방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지 싶습니다.
각설하고, 이태준家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문중이라든가 하는 개념들에 속박당하길 원하지 않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소설들에서도 그랬고 그 집안의 행적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적 환경을 본다면 신식 문화의 이태준家를 그 집안인 철원 장수이씨 세력에서 마냥 반기는 것은 아니었겠죠. 왜냐하면 그것은 제 부친과 조부를 통해서도 익히 전달된 상당히 보수적인 색채의 가풍을 보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태준家가 철원의 고향 친척들에게서 홀대를 받은 것으로도 나오는데, 그것은 그 이태준家의 매우 진보적인 색채를 당시의 조선 후기 상황에 적극 대입하지 않은 착각으로 봄이 합당합니다.
어쨋건 이태준 자신은 스스로의 본관에 크게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의 진보적인 성향 탓도 있지만 앞서 밝힌대로 하필 그의 항렬이 친척들과 같은 연배가 아닌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요.
이제 이태준이 저의 친척인 장수이씨에서 법적으로 남남의 관계인 장기이씨로 된 사연을 말 할 차례군요.
아래는 장기이씨의 항렬표이며, 또한 철원지역 장수이씨 항렬표이기도 합니다. 단 전라도 장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원조? 장수이씨는 이런 항렬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완전 다른 항렬표를 가지고 있더군요.
이 항렬표는 오직 철원지역을 기반으로 한 장수이씨와 난데없이 만들어진 장기이씨만 사용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집안이 같은 항렬표를 가진다는 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위 표에서 9세로 기록된 하(夏)자 돌림이 이태준의 아버지 창하이고 창하는 이태준에게 돌림자를 사용하지 않고 이름을 지었으니 진보적 색채를 가진 가풍이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태준이 태어난 것이 1905년인가 그랬으니까요.
하자 돌림 밑에 있는 규자 돌림에 이규*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은 박정희의 5.16 당시 강원도 지역 사단장을 하시던 분으로 쿠데타 성공 후 일종의 점령군으로 사단장직을 버리고 강원도지사에 취임했던 분입니다.
취임한 목적은 국가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쿠데타에 부정적인 세력인 민선 11대 강원도지사를 밀어내고 급히 강원도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죠.
제 부친도 규자 돌림이고 이규*장군과는 아주 가깝게 왕래하던 분입니다. 저도 어릴 적 이분이 집에 다녀가시는 걸 몇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근데 이태준家는 이규*장군과 좀 더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진 친척이었습니다.
아픈 역사는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장수 이씨 본관인 전라도가 문제였던 것이죠.
경상도 세력이 주축이 된 5.16쿠데타에 협력한 이규*장군이 살펴보니 그 내부에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한 묘한 기류가 감지된 겁니다. 그리고 그 기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고착화 정도가 아니라 더 강해지고 있었죠.
쿠데타 세력의 핵심부는 아니지만 권력의 중심부에서 그것을 지켜본 이규*장군은 그걸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작고하신 아버님의 기억이지만 1970년대 초중반인가 그즈음 이규*장군이 찾아와 우리 본관이 장수이씨가 아닌 장기이씨라며 그 주장에 참여하라고 설득을 했답니다.
그때 아버님과 이규*장군이 대판 싸우고 서로 왕래가 없다시피 했는데, 그리고 한참 후 어느때인가 보니 이규*장군을 중심으로 한 그분들 일가 일부가 할아버지들 중 한분을 떼어내 시조로 삼아, 장수이씨가 아닌 경상도를 본관으로 하는 장기이씨로 바뀌어 호적에도 그렇게 등재가 된 겁니다.
당시 제 아버님 추측컨데 장기이씨란 본관이 만들어진 것이 아마도 이규*장군이 강원도에서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유지하던 1960년대 후반 1970년 초반 사이가 아닐까 추측하시더군요.
위 항렬표 12세의 우(雨)자 돌림은 현재 제 아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저는 여전히 장수이씨고 이규*씨 일족은 장기이씨가 된 것이죠. 그분들 모두 제 친척들인데 본관이 다른 것이니 황당도 이런 황당이 없습니다.
그렇게 법률적으론 장기이씨와 장수이씨는 남이 됐습니다.
하필 이태준을 제목에 들먹인 것은 정작 그 이태준家는 본관이 어디인가와 같은 문제들에 전혀 관심하지 않던 사람이라는 것이죠. 단지 후손인 누군가에 의해 당시엔 장수이씨 집안의 아저씨였던 이태준이 사후엔 장기이씨로 바뀌어 있는 것일 뿐이고요.
즉 이태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현실이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할 겁니다. 참고로 제 아버님은 이태준의 부친인 이창하씨에 대한 기억도 할아버지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던 분입니다.
한편 화가 이중섭도 장수이씨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철원 지역의 장수이씨 세력으로선 금시 초문인 경우입니다. 도대체 장수이씨들은 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서로를 모르는 걸까요?
현대에 들어 장기이씨로 갈라져 나간 일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런 분화의 하나였을까요?
결국 상허 이태준이 살아 생전 겪었던 그 혼란한 세상의 여파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전히 진행형이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진행형은 오늘까지도 아픈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사실 집안의 곤란한 얘기라 평생 숨기고 갈까 생각도 했는데, 그래도 어떤 방식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우리 역사를 객관화 하는 데 중요한 일보가 아닐까 판단했습니다.
박근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니 더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역사가 아닐까 생각됐고요. 좌우간 과거엔 제 집안 아저씨로 남아야 했던 상허아저씨가 지금은 남이 된 사연을 읽으셨습니다.
한마디 부연한다면, 우리 근대사에서 철원이라는 지역이 가진 사회문화적 특성이 정말 귀신이 곡하리 만치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일제시대 철원은 매우 번성했던 지역으로 저 어릴적인 1960년대 70년대에도 철원지역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함경도 등 전국 각지를 출신으로 한 사람들이 혼재했습니다.
도시지역에서만 가능했던 전국 각지의 성씨 본관들이 다 있었으니까요. 일제시대 전국 각지에서 먹고살기 위해 철원으로 몰려든 것이죠. 제 집안은 철원토박이었고요.
즉 지금으로봐선 어쩐지 시골스런 곳이 아니었나 착각하지만 엄밀하게 철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입니다. 도시는 격전이 벌어진 탓에 겨우 다쓰러져 가는 철원 노동당사 하나 정도만 남아있지만 과거엔 매우 발전적으로 변해가던 근대 도시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도시가 하필 분단의 중심에 놓인 까닭에 사람도 갈라졌고 도시도 완전히 파괴되어 마치 한순간에 사라진 마야문명 처럼 그 흔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마 전쟁이 없었다면 철원은 지금의 대전 만큼 큰 도시로 성장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서울과 평양간에 개성 하나만 도시로서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만한 거리에 다른 큰 도시가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한 거죠,
철원이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인데 우리 근대사의 실수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 하나가 묻혀버린 것이죠. 과거엔 궁예가 도읍을 정할 만치 지정학적으로도 선택받은 지역이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좀 이해가 빠르겠네요.
다른 지역들이(이를 테면 항구도시) 외부세력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역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이었다면, 철원은 내부의 세력들간 이해관계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던 곳입니다.
제 집안만 봐도 한사람은 박정희의 쿠데타에 참여한 육군장성이었지만 다른 한분은 인민군에 장교로 입대했으며, 이태준 같은 분은 월북했지만 제 조부님은 월북을 거부했으며, 제 외삼촌의 첫번째 부인은 철원지역 여맹위원장으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 월북을 했지만, 그 남편이었던 제 외삼촌은 그게 뭔소리냐며 그대로 철원에 잔류했습니다.
그게 철원이 곡창지대로서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고의 유연성이 크고,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 시선으로 보던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그런 기록들이 사라진 것이죠.
어쩌면 기록과 문화들이 사라진 것은 당시 철원지역을 기반한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월북을 택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 어머님의 말에 따르면 외삼촌의 첫번째 부인이신 그 철원 노동당 여맹위원장은 요즘 보는 진보적 성향의 어떤 여자도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다고 하네요.
즉 요즘 진보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 보다 더 진보적이었게 당시 지식인들이었답니다. 오히려 지금은 진보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바뀐 상황이 됩니다. 물론 진보가 지나치다 보니 결국 나라가 둘로 갈라져 지금 같은 남북대결 상황이 된 것이고요.
어떤 것이든 너무 극단적인 주장들이 세를 더하게 되면 결국은 분열이 되고 고스란히 국민들의 희생으로 된다는 중요한 경험인데, 요즘 그 경험을 잊는 것은 아닌지...
좌파든 우파든 너무 자신들의 주장만을 앞세우다 보면 결국은 국민 모두의 희생이 또 다시 요구될 수 있다고 봅니다.
*월북이란 표현이 갖는 애매함에 대해 말하면, 사실 이태준의 경우 서울에서 많은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고향이 38이북지역인 철원이라 월북작가란 표현은 틀린 표현입니다. 글에서 저 역시 편의상 월북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수정돼야 할 표현방식입니다.
*몇 년 전 부터인가 모든 서류들에서 본관을 삭제하라는 법이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습니다. 오직 본관은 본인이 호적을 떼 볼 때 표기되는 것이지 남은 공연히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왜 그런 법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이 되려나요?
*이 글의 작성 당시 다음 아이디/티스토리 아이디와 현재 관리되는 카카오 아이디가 서로 달라 혼잡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여러 곳에서 참조/인용되고 있어 삭제하거나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글의 관리 주체가 '북두문학'이라는 출판사에 있음을 공지합니다. 출판사 신고번호는 (제 2022-000046)인 북두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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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한담 2013. 1. 8. 12:45'내 집 앞 눈치우기' 법제화의 문제점
지난 연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눈이 전국에 걸쳐 내린 덕분에 서울 지역도 시내 도로는 물론이고 골목길 곳곳이 눈에 덮혔더군요.
마침 제가 방문한 곳이 약간 언덕길이라 적설로 인해 차량운행이 곤란했습니다. 가까스로 언덕을 올라 도착한 후 누군가 눈을 좀 치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상태라면 화재가 발생해도 소방차 조차 접근하기 어려운데...
그렇게 생각한 내용을 가지고 친구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기겁을 하며 놀래더군요.
"야. 그 무슨 황당한 소리냐. 니 말대로 하면 눈이 오는 날은 출근도 하지 말고 집 앞 눈이나 치우고 있으란 거냐. 아니면 눈치우는 사람을 별도로 고용하라는 거냐"면서 정색을 합니다.
듣고보니 그 제도가 법제화된다면 공익의 목적이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결과가 되겠더군요.
만약 그 집에 노인 부부 혹은 나홀로 노인만 사는 가정인데 눈 오는날 불편한 노구를 꺼내 집 밖에서 눈을 치워야 하는 게 국법이라면 '내 집 앞 눈치우기' 법제화로 인한 과태료는 차라리 자살을 권유하는 법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는 얘기를 친구와 나눴습니다.
소방차 접근 같은 공익성도 중요하지만 그 만약의 경우를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눈을 치워야 하는 것은 또 아닌 것이죠.
방문한 지역의 그 언덕길에 거주자인 노인이 나와 눈을 치우려면 그 노인은 매우 건강해야 합니다. 만약 고혈압이라든가 기타 지병이 있다면 눈을 치우는 정도로도 사망에 이를 수가 있으니까요.
내 집 앞 눈도 못치울 정도로 약한 몸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걸까요?
저는 기꺼이 제 차량의 운행을 자제로 양보할 것이고, 소방차 같은 경우라면 차량에 체인을 미리 감아두는 선예방조치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도시 지역의 내 집 앞 눈 치우기는 다른 방식의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그냥 내가 좀 불편하다는 짧은 생각만으로 '내 집 앞 눈치우기'를 법제화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 사회를 매우 힘들게 하는 제도가 될 것 같았습니다.
국민 모두가 운전기사나 정원사를 고용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삽시다.
'헉! 그 운전기사나 정원사의 집 앞 눈은 누가 치우지?'
'내 집 앞 눈치우기'는 그냥 자율에 맡기는 질서로 남는 게 사회적인 갈등을 최소화하는 이해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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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읽는 우리의 전통문화 2012. 8. 15. 17:46장승
우리나라를 특징짓는 가장 인상적인 코드 중 한가지가 장승입니다. 장승을 얘기할 땐 대한민국이란 표현도 좀 어색하고 그렇다고 조선이라 하자니 그것도 역시 어색합니다.
그냥 우리나라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데, 이런 것이 비단 장승 뿐 아니라 아리랑 같은 민요에서도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요가 아닌 '우리의 소리'라는 표현으로 가야 거북하지 않습니다.
위 사진의 장승은 110년 전에 찍힌 것으로 우리 장승의 기본형을 원형대로 갖춘 모습입니다. 생활의 토템이며 민초들 가장 지근거리의 위로가 되는 형상이죠.
기본틀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표현이 자유롭다는 점이 우리 문화의 개방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부탁이 있다면 이것을 미신이라든가 얘기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자는 겁니다.
장승은 우리의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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